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 선정작인 '폭로'(감독 홍용호)에는 연극 애호가들이 반가워할얼굴이 등장한다. 바로 대학로 여행 연극장르의 독보적인 배우 임승범이 출연하는 것. 무대에서 보던 얼굴을 스크린으로 본다는 것은 관객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지만, 배우 스스로에게도 새로운 출발이었다.
"예고편 나오기 전만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전주 가서 영화 볼 거라는 이야기를 가볍게 했는데지금은 너무 긴장돼요.사람들이 스크린을 통해 제 연기를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떨리는동시에 설레고 감사한 마음도 들어요." 배우 임승범. 사진=본인 제공'폭로'는신출내기 변호사 정민(강민혁 분)이남편을 살해한 피고인 윤아(유다인 분)의 국선 변호를 맡아 뒤얽힌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를 그린다. 살인사건을맡은 검사 역으로 분한 임승범은비밀에 쌓인재판을 긴장감으로 휩싸이게 만든다.
임승범은 캐스팅 비화에 대해 "작품에 우연히 들어가게 됐다. 검사 역을 맡기로 예정돼 있던 배우가 함께하지 못하게 돼서 새로 뽑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들었다. 그때 감독님께서 700명 정도의 프로필 묶음을 손가락으로 대충 넘겨보시다딱 제 프로필에서 페이지가 멈췄다는 거다. 이후 감독님께서 한 번 리딩만 해볼 수 있겠냐고 제안을 주셔서 좋은 경험이겠거니 하고 갔다가 덜컥 붙었다"라고 전했다. 이우연한 기회는 그를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까지 이끄는 행운으로 이어졌다.
영화 '침묵', '증인' 등을 각색하며 이름을 알린 홍용호 감독은 '폭로'를 통해 장편 상업영화 데뷔식을 치른다. 임승범은 홍용호 감독과의 호흡에 대해 "홍용호 감독님은 제 방식의 연기를 좋아해 주셨다. 그래서 원래 대본 상에 있는 느낌대로 촬영하고, 제 방식대로 늬앙스를 바꿔서 한 번 더 촬영하기도 했다. 저 나름대로 연구하고 씨름하면서 검사의 철두철미하고 진지한 장면을 만들려고 했다"라고 설명하며 "'폭로' 촬영 방식은 어떻게 보면 연극 같기도 했다. 보통 영상은 짧은 컷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는데, '폭로'는 이전 호흡부터 이어서 길게 촬영했다. 이렇게 좋은 작품으로 장편 데뷔를 하게 돼 기쁜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변호사 출신인 홍용호 감독은 경험에서 발견한 이야기들을 조언하며 배우들이 연기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임승범은 "홍용호 감독님이 만난 실제 검사들이 조금 거친 이미지가 있었다더라. 검사 역은 처음이라 법원 공판을 네 번 정도 가서 실제 재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봤다"라고 전했다.
이어 "정말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짓눌리는 느낌이다. 방청객이 술렁거려도 검사와 변호사는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처럼 가라앉은 분위기로 서 있었다. 법원에 다시는 올 일이 없도록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웃음)"라고 덧붙였다. 배우 임승범. 사진=본인 제공그가 맡게된 검사 역은 살인사건 변호를 맡은정민과 치열하게 대적하는 인물이다. 두 인물사이에 흐르는냉랭한 기운은 숨겨진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라는 궁금증마저 들게 만든다. 임승범은맡은 역할을 두고 "악역처럼 보이지만, 합리적인 생각에서 나온 행동들이라고 생각했다"라며 "상대 변호사를 탐욕적인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떠보려고 하는 거다. '윤아'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강하게 의심한다. 이런 태도로 연기 결만 유지하면 작품에 잘 묻어나겠구나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배우 강민혁과의 호흡에 대해서는 "민혁이는 프로페셔널하고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제가 그동안 연극을 많이 해서 색깔이 강한 연기를 많이 봤는데, 담백한 연기를 보니까 새롭더라. 민혁이는 대본을 해부하는 능력이 좋다. 한마디한마디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체크하고, 아니다 싶으면 한 번 더 가자고 말하는 주관이 있다. 함께 호흡하며 정말 많이 배웠다"라고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음악이라는 공통 분모로 이어져 급속도로 친해졌다. 촬영 당시 강민혁의단상집'다 그런 건 아니야'가 출간을 앞두고 있어"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기겠다"라는 약속까지 했다고. 최근 수많은 연극 배우들이 무대를 넘어 다방면에서두각을 보이는 것처럼 임승범 또한 '스타트업', '슬기로운 의사생활', '모범택시' 등을 통해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춘 바 있다. 디즈니+ '그리드'에선 서강준과 호흡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눈길을 끌기도 했다.
신뢰감 가는 보이스 덕분일까, 임승범은엘리트 계열의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그에게 그간 맡아온 역할 외 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냐고 질문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인생작이 '나의 아저씨'라며 아이유(이지은)이 연기한 '이지안' 역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남성 배우가 여성 역할을 말하는 경우가 드물기에 이유를 묻자 그는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인 '편안함에 이르렀나'가 너무 좋았다. 제 꿈도 편안을 이루는 거다. 아주 나중엔 조용히 글을쓰면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있다. 인생이 바닥을 치는 역할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라며 "연극 '라틴아메리카 프로젝트'와 '라틴아메리카 콰르텟'에서 선보인 '배영진'이라는 역할이 그런 인물이었다. 저 또한 생계를 위해 배송 아르바이트를 했던 시기가 있는데, 부끄럽기보다 그런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고백했다. 배우 임승범. 사진=본인 제공2012년 첫 연극 무대를 밟은 임승범은 올해 10년차 배우 타이틀을 달았다. 그는 10년 가까이 연기자 생활을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기록'을 꼽으며"저는 연기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의 제 모습을 기록하는 거다. 앞으로 더 많은 영화, 드라마에 저를 기록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연기하는 순간은 매번 새로워요. 연기를 통해 제가 몰랐던 스스로의 모습을 봤을 때 '저게 나야? 너무 재미있네'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폭로' 전에 최동훈 감독님의 '외계+인'도 짧게 촬영했는데, 해보고 싶은 게 많아지더라고요. 긴 호흡의 영화를 통해 자유로운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10년이라는 터닝포인트를 맞은 그는 '유연한 배우'가 되고 싶다며 "어떤 역할을 맡아도 제 옷을 입은 듯 어울리는 배우. 이 방면에선 권해효 선배님 최고이지 않으실까. 주연으로 나서지 않을 때도 연기 자체를 보는 재미가 있다"라고 배우 권해효를 향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폭로'는 극장 개봉을 준비중이다. 그 역시 전주국제영화제를 넘어 다양한 스크린에서 만날 관객들에 기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임승범은 앞으로 만나게 될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싶을까. "자주 볼 수 있는 배우로 다가가고 싶어요. 스크린에 있어도 친구 같은 느낌이 드는 거죠. 이정은 선배님처럼 강렬하면서도 친근한 배우가 되길 바랍니다. " 한편 임승범은 오는 5월 26일 개막하는 연극 '클럽 베를린'과 '클럽 라틴'으로 열일 행보를 이어갈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