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금보령 기자, 박준이 기자, 김윤진 인턴기자] 국회에 제출된 각종 입법안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예상비용이 5년 전보다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가 의원 발의법안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경제가 11일 국회의안정보시스템을 통해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130일간(2017년과 2022년 5월10~9월16일) 의원들이 제출한 법안을 각각 전수조사해 비용추계를 따져본 결과, 법안 이행을 위한 예상비용 총액은 200조4493억원에서 75조6134억원으로 크게 줄었다. 조세지출과 수입감소 등을 모두 합친 액수다. 법안에는 비용추계서를 붙여 재정수반 여부를 따지는데, 그만큼 법안 이행에 필요한 재정 부담이 줄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정부의 국정기조가 반영된 결과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복지강화와 함께 재원마련에 재정의 역할을 강조한 반면, 현 정부는 재정 씀씀이를 줄이되 민간활성화를 중시하고 있다.
정부 출범 초기에는 국정과제 이행을 위한 정지작업이 필수다. 이 기간 발의 법안을 주목하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법안에 첨부된 비용추계 규모가 큰 차이를 보인 것 역시 국정기조를 반영한 결과다.
연평균 비용이 조(兆)단위를 웃도는 법안 숫자는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엔 17개에 달했다. 반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엔 4개로 큰 차이를 보였다.
지난 정부에선 복지 강화와 함께 정부 재정의 역할이 강조된 영향이 컸다.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는 맞춤형 사회보장,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의료공공성이 명시돼 있다. 이른바 '문재인 케어'인 건보 적용 확대로 국가의 역할이 커진 게 대표적이다. 또 지난 정부 초기 경제기조인 소득주도성장을 이끌기 위해 공공일자리 재정을 확대했고 실업급여 대상도 늘렸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재정 수반이 많은 법안들이 대거 발의됐다. 연평균 36조원 이상이 투입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비롯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안 등이 잇달아 나왔다. 여기에는 생계, 교육, 의료수급권자 선정기준을 상향하거나 청년활동 지원수당 소득인정액 산정 등의 내용이 담겼다. 5세 이하 아동에게 수당을 지급하기 위해 연간 2조9000억원이 필요한 아동복지법 개정안을 비롯해 구직급여일수 연장을 위해 연평균 2조5000억원이 소요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도 발의됐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2017년은 박근혜 정부를 향한 촛불집회 직후 시기고, 이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반적으로 예산 지출 증대를 용인하는 그런 분위기가 국회에 광범위하게 형성이 돼 있었다"며 "대규모 예산을 수반하는 포퓰리즘 성향의 법안들을 다수 발의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 정부에선 '건전 재정' 기조가 강하다. 600조원이던 국가채무가 지난 정부를 거치면서 1000조원을 넘어서면서 지출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정기조를 뒷받침해야 하는 여당 보다는 야당 의원들의 발의 법안에서 비용추계를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추가 재정 규모가 가장 큰 상위 10개 법안 가운데 8개가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내놓은 것이었다. 1위는 김회재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으로 아동수당 수급 연령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외에도 대중교통 요금 특별할인제도 운영, 장애 대학생에 대한 교육지원 강화 등 복지와 연관된 법안이 다수였다.
'수입 감소 법안' 與, 車 개소세법…野는 증권거래세 폐지 눈길
다만 재정 수입이 줄어드는 법안 발의에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정우택·배준영 의원은 법인세 세율 구간 단순화와 최고세율 인하를 담은 법인세법 개정안을 내놨으며 류성걸 의원은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으로 농·어업 조세감면 일몰 연장을, 같은 당 서병수 의원은 개별소비세법 개정을 통해 대부분 자동차에 대한 개별소비세를 폐지하자는 입장이다. 윤석열 정부가 세율 정상화를 위해 법인에 대한 세부담 완화를 경제정책 기조로 내세우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에도 윤한홍 의원은 연평균 6조원 이상 세수 감소가 예상되는 개소세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윤석열 정부는 글로벌 경제 위기에서 국내 경제라든지, 국가 채무 추이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면서 "재정건전성과 위기 극복에 전력하고 있어 복지를 상대적으로 늘리기가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민주당에서는 기업보다는 개인의 세부담 완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 김두관 의원은 21조원의 세수 감소가 예상되는 소득세법 개정안을, 고용진 의원은 증권거래세 폐지가 담긴 증권거래세법 폐지법률안과 농어촌특별세 과세를 제외하는 내용의 농어촌특별세법 개정안을 각각 발의했다.
비용 추계 법안 숫자 되레 늘어…재정도움 법안은 미미
현 정부 들어 발의 법안 이행을 위해 필요한 재정 총액은 줄었지만 비용 추계가 요구되는 법안 숫자는 오히려 늘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130일간 의원이 발의한 법안 2412건 가운데 비용 추계가 요구된 법안 수는 820건이었다. 반면 윤석열 정부 이후 같은 기간에는 1698건이 발의돼, 1128건 법안에서 비용 추계가 필요했다. 비용 수반 법안 비중은 오히려 늘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1개 법안당 비용 추계 규모는 지난 정부 8909억원에서 현 정부에선 2843억원으로 줄었다.
재정 수입에 도움이 되는 법안 발의는 거의 드물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김광수 당시 민주평화당 의원이 발의한 지방교부세법 개정안과 이종구 전 미래통합당 의원이 내놓은 소득세법 개정안 등 2건만이 세수 확대에 도움이 되는 법안으로 분류됐다. 현 정부에선 허영 민주당 의원의 강원특별자치도 설치법 개정안이 유일한 세수확대 법안이었다.
비용 추계 요구 법안이 늘어나면서 재정 수반 법률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이 국회예산정책처에 의뢰해 제출받은 '2022~2070년간 국가채무 장기전망'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의 재정정책과 제도가 지속될 경우 2040년에는 국가채무가 2939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00%를 넘어서게 되고, 2060년에는 5624조원, 2070년에는 7137조원 달하는 것으로(연평균 4.0%) 추산됐다. 재정준칙 같은 안전장치는 여전히 논의 대상에서 멀다.
다만 재정 지출을 늘리는 법안을 무조건 도외시해선 안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기재위 소속 양경숙 민주당 의원은 "대기업 초부자에게는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정책을 펴고 불가피한 재정지출을 재정 건전성 저해 요인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며 "재정이 더 적극적인 역할수행을 하지 못할망정 민주당 정부가 국민 지원에 선심 쓰고, 엄청난 빚만 떠넘긴 것처럼 호도하는 건 문제"라고 얘기했다. 금보령 기자 gold@asiae.co.kr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김윤진 인턴기자 yjn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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